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양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947년 중국 상하이 출생. 1949년 가족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, [[타이베이]]에서 성장한다. 한마디로 [[외성인]]. 동료였던 [[허우샤오셴]] 감독처럼 [[객가]] 출신이다. [[허우샤오셴]], [[차이밍량]]과 함께 대만 3대 거장으로 불리기도 하다. 특히 허우샤오셴 감독 스스로가 에드워드 양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거장이다. 영화부터 시작해 [[데즈카 오사무]], [[록 음악|록]] 음악을 좋아하는 등 예술가 지망생이었지만, 의외로 영화계에 입성한 건 꽤 늦었다. 당시 대만엔 영화를 배운다는 개념이 미약했으며, 에드워드 양 감독은 대만을 떠나 미국에서 [[USC]] 영화학과에 다니긴 했으나 퇴학했다. 결국 [[플로리다 대학교]]에서 컴퓨터 공학을 배워 졸업. 7년 동안 컴퓨터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[[아귀레, 신의 분노]]를 보고 영화를 하기로 다시 마음먹고 1981년 대만으로 돌아와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각본 작업을 한다. 1982년 옴니버스 영화 [[광음적고사]]에 감독으로 참여함으로써 대만 뉴웨이브의 시작을 알렸다. 1983년 이후 한 여인의 일상을 다룬 [[해탄적일천]]을 통해 장편 영화에 데뷔해 좋은 평가를 받는다. 1985년 [[허우샤오셴]]을 캐스팅해 대만 청춘들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[[타이페이 스토리]]가 호평을 받았다. 1986년 [[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]]의 [[욕망]]에 영감을 받은 모더니즘 영화 [[공포분자]]를 내놓으면서 친구였던 [[허우샤오셴]]과 더불어 대만 뉴웨이브를 이끄는 기수가 된다. 동시에 타이베이 스토리의 주연을 맡았던 가수 차이친과 결혼한다. [[파일:abrightersummerday.jpg|width=35%]] 1991년 그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감독으로 만들어준 것은 5년 간의 침묵을 거친 뒤 내놓은 [[고령가 소년 살인사건]]이었다. 1961년 대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최초의 미성년자(중학생) 살인 사건을 소재로 만든 이 영화는 3시간 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독재와 폭력으로 얼룩진 굴곡의 대만사와 쓰라린 성장기를 겹쳐 놓으면서, [[봉준호]]를 비롯해 많은 이에게 세계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. 또한 이 영화는 [[장첸(배우)|장첸]]의 데뷔작이기도 하다.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감독판이 재개봉하기도 했으며, 영상미와 음악이 워낙 뛰어나서 마니아도 상당하다. 1980년대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 속에, [[마틴 스콜세지]] 감독은 '''위대한 감독 에드워드 양의 최고 작품'''이라고 극찬했다. 또한 '''[[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]] 84위''', [[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]]에 선정될 만큼 걸작이다. 그러나 에드워드 양 감독은 비평적 성취와 무관하게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다. 1990년대 들어서 대만 뉴웨이브는 자국 관객들에게 냉대받기 시작했다. 1994년 [[칸 영화제]]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이색적 풍자 코미디 <독립시대>는 평단의 호평에도 무관에 그쳤다. 1996년 [[베를린 영화제]] 경쟁 부문에 진출해 비공식 특별상을 수상한 [[마작]]은 호평을 받았음에도 별다른 홍보도 받지 못하고 대만에서 흥행에 실패했다. 이 시기는 점유율로만 따진다면 대만 영화의 암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. 비록 대만이 민주화하면서 검열이 풀리고 세계적 호평을 받는 영화 작품도 많이 나왔지만, 홍콩 영화계가 쇠락하기 시작한데다 스크린 쿼터제의 폐지까지 겹치면서 그 자리를 할리우드 등 수입 영화가 차지했고, 이에 따라 대만 영화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. 설상가상으로 차이친과의 이혼이 겹쳐지면서 대만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에드워드 양 감독은 대만을 떠나버린다. 피아니스트랑 재혼도 하고 아예 거처도 미국으로 옮겼다. [[파일:하나 그리고 둘 재개봉 메인 포스터.jpg|width=35%]] 2000년 일본 자본의 투자를 받아 대만에서 만든 [[하나 그리고 둘]]이 [[칸 영화제]]에서 발표된다. 현대 타이베이의 중산층 가족의 일상과 희노애락을 다룬 이 영화는 [[고령가 소년 살인사건]] 급으로 평단의 격찬을 받으며 [[칸 영화제]] 감독상을 수상하게 된다. '''21세기에 나온 최고의 영화''' 중 하나라는 찬사, '''[[BBC 선정 '21세기 위대한 영화 100편']]중 8위''', '''[[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]] 93위''', 더불어 에드워드 양 영화 중에서도 박스오피스 최고치를 기록한 이 영화였지만 정작 대만에서는 한동안 제대로 상영하지 못했다. [[금마장]] 시상식에도 오지 않고 2년 뒤에야 영화제에서 몇 번 틀었을 정도였다. 이 영화가 대만에서 제대로 개봉한 때는 그의 타계 10주년이 되던 2017년 7월 28일이었다. 한국에서는 단관 개봉. 참고로 당시 대만 영화의 점유율은 2001년 기준으로 '''0,2%'''까지 떨어지던 시절인지라 대만 영화 감독들에게 그야말로 비참한 시절이었다. 대만 영화 감독들이 그나마 기지개를 켤 수 있었던 것은 2006년에 [[영원한 여름]], 연습곡, [[말할 수 없는 비밀]] 등 흥행작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이다. 하지만 2000년부터 발병한 [[폐암]] 때문에 투병 생활을 하다가 생애 첫 애니메이션 제작 계획도 착수하지 못한 채 2007년 6월 29일 타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